결혼지식/결혼상식

'시어머니 눈치보기' 역사는 의외로 짧다.

홀기 2007. 4. 17. 16:45
요즘은 여자가 시집을 가도 시집으로 들어가 살면서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경우, 즉 시집살이를 하는 경우는 잘 없습니다만
그래도 전혀 남남간이었던 시어머니, 시아버지외 시댁식구들을
한 가족으로 여기면서 이래저래 눈치보기는 떨칠 수가 없습니다.
이곳 웨프 게시판에 올라오는 글들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아직 결혼을 하기 전 결혼을 준비하시는 분들이 대부분인데,
상견례에서부터 예단, 이바지, 폐백에 이르기까지
신부들이 시댁식구들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가볍지 않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좌우간 여자가 시집을 가고, 시댁식구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게 된 것이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고
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당연한 일로 여깁니다만
의외로 여자들의 시집살이 역사는 얼마되지 않습니다.
우리네 반만년 역사 전체를 두고 볼 때 불과 최근부터입니다.
여자가 시집을 가면 친정을 떠나 남편의 집으로 들어가
남자집의 식구로 살아가는 결혼관습은 사실 중국의 관습이었답니다.

그럼 우리나라의 전통 결혼관습은 어땠는가?
중국과는 반대로 남자가 장가를 가서 여자의 집에 얹혀 살면서
아들 딸은 물론 심지어 손자까지 볼 때까지 여자의 집에서 살았답니다.
그게 바로 '처가살이'인 겁니다.
요즘처럼 여자가 시집을 가도 시부모와 함께 살지 않고
남편과 단둘이서 살림을 나와서 살아도 시댁 스트레스를 겪는데,
그전에 여자가 시집을 가면 당연히 시댁으로 들어가서
시부모는 물론 시조부모 시누이 시동생 등 시댁식구들과
함께 살아 가면서 시댁식구들의 온갖 뒷바라지를 해야 하던 때의
스트레스는 익히 짐작할만 합니다.
그런데 과거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서 살 때
즉 지금과는 반대로 남자가 처가살이를 할 때
남자들이 장인 장모는 물론 처가식구들로 부터 겪는
스트레스도 여자들의 시집살이 스트레스 못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한다.'란 말이 나온 듯 합니다.

그럼 도대체가 남자들에게 스트레스 팍팍주면서
처가살이를 시키던 것이 언제부터 여자들의 시집살이로 뒤바뀌었을까?
고려시대 때까지는 남자들의 처가살이가 당연시 되었답니다.
그런 결혼관습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한동안 그대로 지속되었답니다.
남자들이 처가살이를 할게 아니라 중국처럼
여자들에게 시집살이를 시키자고 생각한 것이
1400년대 초무렵 조선시대 3대 임금인 태종 때부터 시도를 했다고 합니다.
남녀가 결혼을 하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것은
당시로는 엄청난 혁명과 같았을 겁니다.
그래서 그런지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시켜도 도대체가
말발이 먹히지 않아서 그게 잘 먹혀 들지 않고
여전히 백성들은 남자들이 처가살이를 하였답니다.
우리가 잘아는 이율곡도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친정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 나서 성장하였으며,
홍길동전의 작가인 허균도 외갓집에서 태어났답니다.

좌우간 태종임금 때부터 처가살이를 시집살이로 바꾸겠다고
작심한 이래 임금이 7번이나 바뀌고 100년이 넘도록
꾸준히 백성들을 계몽해 왔지만 그게 잘 안먹혀 들어 갔는지...
1520년경 조선의 11대 임금 중종 때는
이대로 해선 안되겠다 싶었는지 좀 쎄게 나가자고 작정을 했답니다.
우선 왕실에서부터 솔선수범하여 공주나 옹주가 시집을 가면
남편을 궁중으로 데려와서 살게 하지 않고 남편의 집으로 보내 버렸답니다.
임금이 그렇게 솔선수범을 하니까 임금의 눈치를 봐야 하는
신하들도 당연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겁니다.
좌우간 그때부터 여자들이 하나 둘 결혼을 하면
신랑을 친정으로 데려와서 살지 못하고 시집으로 들어가서 살게 되었는데,
임금 가까이 있으면서 임금의 눈치를 봐야 되는 벼슬아치들은
잘 따랐지만 임금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처가살이 관습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선시대말까지도 숫자는 줄었지만 그런 관습은 이어져 왔답니다.

일부에선 딸자식을 결혼시켰지만
나라에서 사위를 집으로 데려다 놓지 못하게 하니깐
사위를 데려올 수는 없고 대신 딸을 시집으로 바로 보내지 않고
한동안 그냥 친정에서 데리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동안엔 사위가 가끔씩 들려서 자고 갔답니다.
그렇게 별거를 시키다가 딸이 임신을 하거나
심지어 아이를 낳은 후에야 시댁으로 보내 줬다는군요.
그런 관습이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에도 한동안
일부 지방에선 그렇게 한 걸로 압니다.

시집만 갔다하면 당장에 방을 빼주곤
친정을 떠나야 하는 요즘의 결혼풍습은 불과
100년도 안되는 짧은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남자들의 처가살이 관습을 여자들의 시집살이 관습으로
바꾸는데는 수백년이 걸렸지만
그걸 다시 원래대로 뒤집는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언젠가 결혼을 앞둔 총각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본 결과
'처가살이도 좋다'고 답변한 총각들이 60%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 총각들의 의식을 보면 여자들의 시집살이를
남자들의 처가살이로 뒤집는데는 마음만 먹으면
의외로 빨리 뒤집힐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되면 지금처럼 신부들의 시어머니 눈치보기가
신랑들의 장모 눈치보기로 뒤바뀌지 않을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