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지식/전통결혼풍습

신랑 신부의 행렬은 그 누구도 막지 못했다.

홀기 2007. 4. 17. 16:29
서울 종로쪽에 가보신 분중에서 눈여겨 보신 분들은
종로 대로변에 널어선 건물 뒷쪽으로 좁은 길이 종로와 나란히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종로 뒷 길을 '피맛길'이라고 하는데,
'피마(避馬)길'이란 말 그대로 '말을 피해 가는 길'이란 뜻입니다.
옛날에 종로통을 걸어서 가든 말을 타고 가든 가다가 멀리 앞에서
지체높은 분의 행차가 오게 되면 길을 피해 줘야 되는데...
바로 그런 높은 분의 행차를 피해서 가는 길이라고 해서 그렇게 불렀답니다.
만약에 높은 분의 행차를 피해주지 안했을 땐 어떻게 되느냐?
물론 아무런 방해를 하지 않았다면 괜찮겠지만
만에 하나 행차를 실수로라도 방해를 하게 되면 잡혀서 혼이 나게 되지요.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높은 분의 행차를 방해하다가 잡히면
즉석에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일단은 부근에 있는
'가가(노점)'에 맡겨 놓았다가 나중에 처벌을 받았다고 하는군요.
처벌이란 것은 곤장을 몇 대 맡거나 벌금을 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랑 신부의 행렬만은 높은 분의 행차를 피하지 않아도 되었답니다.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혼례식을 올린 다음에 첫날밤은
신부집에서 지내고 다음날 또는 며칠 후에 신부를 데리고
신랑의 집으로 가게 되는데 이를 '우귀' 또는 '신행'이라고 합니다.
일단 신랑의 차림새가 당시의 당상관(오늘날 정부부처의 차관보이상)의 관복 차림에다
신부는 공주나 당상관의 부인네 차림새일 뿐만 아니라
신랑은 말을 타고 일산(햇빛 가리개)을 받쳐 들고,
신부는 지붕에 호피를 덮은 가마를 타고, 그 뒤를 따라 하인들이
신부의 혼수며 예단, 폐백, 이바지를 지고 줄줄이 따랐을 테니
왠만한 지체높은 벼슬아치의 행차 못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혼례는 '일륜지 대사'라 하여 벼슬을 하지 못한 일반 평민들도
일생에 한번 혼례식 때만큼은 높은 관리들이나 입을 수 있는
관복을 입도록 하였으며 신부 또한 공주나 대가집 마님들이나 입을 수 있는
활옷 또는 원삼 족두리 차림을 할 수 있도록 특별히 허락을 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의 행차인만큼 비록 지체높은 분의 행차라 해도
신랑 신부의 행렬만큼은 막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혼례식 때 신랑 신부의 차림새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전과정을 조목조목 법으로 규정하여 그대로 따르게 함은 물론
돈 많은 사람들이 자녀 혼례에서 필요이상으로 많은 돈을
쓰지 못하도록 얼마이상은 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하였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옛날이 요즘보다 시집가기가 훨씬 더 쉬웠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돈이 있는 집이든 없는 집이든 딸을 시집 보내면서
혼수 때문에 적지 않은 고민을 했던 것은 오늘날과 다를 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조 초기 청백리 명신으로 유명한 황희 정승이 건강이 악화되어
병석에 눕게 되자 그 부인이 아직 시집을 못 보낸 막내딸 혼수를 걱정하니
'그 아이 혼수는 영남의 광대 바우쇠가 마련해 줄테니 염려마오'라고
하고는 그만 죽어 버렸답니다.
당시 광대들이라면 요즘의 가수나 탈렌터들에 해당이 되는데
당시에는 가장 천민에 속하는 미천한 신분이었답니다.
그런 천한 신분인 광대가 최고의 양반인 정승 딸의 혼수를 마련해 준다니...
아마도 황희 정승의 부인도 남편이 병이 깊어 헛소리를 한다고 여겼을 겁니다.
황희 정승이 죽은지 3년이 지난 후 나라에 큰 경사가 있어서
전국의 유명한 광대들을 불러서 재주를 부리게 하였는데...
마침 영남의 광대패중 '바우쇠'란 광대의 묘기 순서가 되자
뒷 꽁무니에 차고 있던 수건을 끌러 엉덩이 이쪽 저쪽에다 대면서
'이것은 황희 정승댁 정경부인 마님이 하고 구차해서
속옷 하나를 막내 따님과 돌려가면 입는 격이렸다.'하고 대사를 읊었답니다.
 
이를 본 임금이 감동하여 어명을 내리길
'황희 정승 막내 딸의 혼수를 공주의 혼수에 준해서 마련하여 보내라'하였답니다.
황희 정승의 예언이 그대로 맞았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딸 혼수는 욘사마가 마련해 줄 것이다.'라고
자신있게 예언할 수 있는 청백리가 있을지는 모르겠군요.
 
좌우간 옛날의 신부들도 요즘 신부들이 가장 골치아파하는 예단이며
이바지, 폐백 그리고 혼수 등을 해갖고 가긴 갓는데 따로따로
갖고 가는게 아니라 일단 결혼식을 마치고
신부가 시댁으로 들어갈 때(신행 또는 우귀) 한꺼번에 갖고 갔었습니다.
요즘에 결혼 절차에 비유를 한다면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
처음으로 시댁에 갈 때 모든 것을 갖고 간 셈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