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

[스크랩] `상한 감정의 치유` 요약

홀기 2009. 9. 14. 11:14

1. 상처난 감정들

  상처난 감정이란 무엇인가? 가장 공통된 감정 중의 하나는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다. 즉, 계속적인 근심을 안고 있으며 자신을 부적합하게 여기며 열등감을 가지며 “나는 좋지 못해”라고 자신에게 늘 말하는 사람이다.

  또 다른 어떤 종류의 사람들은 좀 나은 용어로 불러서 “지나친 완전주의자”라고 한다. 이것은 “나는 절대로 제대로 성취할 수 없어. 나는 절대로 어떤 것을 만족할 만큼 잘 하지 못해. 나는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이나, 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내적 감정을 소유한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의 상처난 감정들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 거룩하신 상담자 되시며, 거룩하신 정신 위생 학자이신 성령님께서 다른 한 쪽에서 우리의 문제를 붙들고 계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쪽 편에서 내가 문제를 잡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치료 과정에서 여러분과 내가 해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1)문제를 똑바로 직시하라.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를 다른 사람과 깊이 나눌 수 있는 용기가 없기 때문에 깊은 마음의 치료를 경험하지 못하게 된다.

2)어떤 문제이든지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

  당신은 당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 책임이 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것을 그치고 자신의 책임을 시인하기 전까지는 당신의 손상된 감정을 절대로 치료받지 못할 것이다.

3) 고침을 받기 원하는지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라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보라 “내가 진정으로 고침을 받기 원하는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나의 문제를 직시할 용의가 있는가?

4) 문제 가운데 연관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하라.

  책임을 스스로가 지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거의 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5)자기 자신을 용서하라.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게도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놓으셨다. 이제 당신도 자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지 않은가?

6)문제의 핵심이 무엇인가 또한 그것을 위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 바를 성령님께 구하라.

  성령님께서는 어디를 두들겨야 할지를 아신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잘못 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


2.죄책감, 은혜, 그리고 빚진 것 거두어 들이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 용서받지 못한 사람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죄책감과 분노로 고민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은 여러 가지 형태의 정서적 갈등을 내적으로 경험하면서 고민하는 옥고를 치루며 살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용서받지 못한 자와 용서하지 않은 사람들은 죄책감과, 원망하는 마음과, 애쓰며 갈등하는 것과, 근심하는 마음의 네 가지 어려운 문제 가운데 빠진다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네 가지 요소들은 긴장감과 갈등과 다른 모든 종류의 정서적 문제들을 낳게 한다.

  용서해야 할 대상이 있는지에 대한 여부를 가리는 세가지 테스트를 자신도 거기에 포함시켜서 함께 해 보기 바란다.

1) 제일 먼저, 원망하고 있는 대상이 있는가를 테스트 한다.

  당신은 지금까지 계속 마음 속에 앙심을 품고있는 대상이 있지는 않은가? 부모, 형제, 애인, 남편 혹은 아내, 친구, 동료 어린 시절에 당신에게 잘못했던 사람, 초등학교 때 선생님, 혹은 당신의 성장기에 성적인 상처를 입힌 사람 중 어떤 사람에 대해 원통함을 품고 있지 않은가?

2)책임감 테스트는 조금 더 까다롭다.

  “오늘! 만약에 내 주위의 아무개, 아무개, 내 부모, 내 아내, 내 자녀, 환경, 하나님- 그들이 내게 마땅히 갚아야 할 것을 갚기만 하였더라면 나는 지금처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지 않았을텐데. 나는 이러한 모든 인격적인 문제들이 없었을거야. 그들이 내게 빚진 것을 갚았더라면 내가 주인에게 진 빚을 다 갚을 수 있었을텐데.” 많은 경우에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것과 자기 스스로가 책임감을 갖는 것은 같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서 이 둘은 동시에 처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3)기억을 상기시키는 것과 나의 반응을 시험하는 것에는 매우 교활한 면이 포함되어 있다.

  당신은 어떤 사람에게 화를 낼 대 그 이유가 그 사람이 누구를 연상시켜 주기 때문에 그러한 반응을 보이는 적이 있지 않은가? 왜 그런가? 그 이유는 당신이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에 자기가 용서하지 못한 사람을 연상케 하는 사람이 나타났을 때 자신의 감정이 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노출된다.


  우리가 과거에 받은 모든 상처를 성서적으로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하나님은 내가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상처들과 죄의 허물을 담당하셔서 그것들을 싸매시되 그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를 변화시켜 주신다. 각 교회는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곳이어야 한다. 우리가 사랑을 받기 때문에 서로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곳이다. 용납을 받기 때문에 서로를 용납할 수 있는 곳이다. 은혜를 체험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 은혜롭게 행동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불 기한을 연장해 주겠으니 그렇게 알라”고 덧붙여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가 우리를 자유케 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다른 사람을 자유케 하며 더 나아가서 은혜와 사랑을 행동으로 옮기게 된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짧게 이렇게 요약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롬13:8)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말씀이 있다. 선물이란 단어의 어원이 네 번이나 사용되었다. 즉 문자 그대로 읽으면 “선물을 거저 받은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도 거저 선물을 주어라!”(마10:8)

  

3. 상처를 입은 경험이 있는 치료자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이해하시고 그 감정을 함께 나누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발견하며, 긍휼을 얻게 된다는 것을 알면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다. 용서를 구해야 할 때도 나올 수 있고 우리의 죄 때문에 나아갈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연약한 감정에 의해서 시달리며, 괴로워 할 때도 나아갈 수 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의 인간성과 완전히 동일시 하였고 특히 십자가에서 그는 우리의 모든 감정들을 스스로 경험하셨다. 그리고 그는 우리의 연약한 감정들을 짊어지셨다. 우리는 이제 그것들을 홀로 지고가지 않아도 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인적인 분이 아니시다. 그는 스스로 우리의 모든 경험 속에 들어오셔서 자신을 온전히 우리와 함께 나누신 분이다.”(히4:15) 이것이야 말로 우리에게 소망과 치유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확실한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보살피실 뿐 아니라 온전히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신다는 사실이야 말로 우리의 손상된 감정들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치료 요법의 요소가 된다.


4. 사단의 치명적 무기

  사단의 병기고에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에 일부는 심리적인 무기이다. 두려움이 그중에 하나이고 의심도 이에 속한다. 분노, 악심, 걱정 그리고 죄책감도 물론 여기에 해당된다. 오래동안 지속되는 죄책감은 떨쳐버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약속을 믿고 용서받은 은혜를 체험한 후 까지도 계속 남아 있는 것 같다. 사단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사용하는 가장 강력한 심리적 무기인데 이 무기는 치명적인 미사일의 효과를 지니고 있는 바로 ‘낮은 자존감’이라고 부른다.


  1)낮은 자존감은 당신의 잠재력을 마비시킨다.

  예수님은 달란트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두려움과 스스로 적합지 못하다고 느끼는 감정에 의해서 마비되고 말았다. 실패할까봐 두려워서 그의 달란트를 투자하지 않고 그것을 땅에 묻어버림으로써 안전하게 지내려고 했다. 그의 삶은 고정된 자산과 같았다. 주인으로부터의 거부감에 대한 두려움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 투자를 하는 다룬 두 사람과의 비교의식에 따른 두려움, 그리고 모험을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고정되어 버렸다. 그는 자존감이 낮은 많은 사람들처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그리스도인인 당신을 향해 소원하는 일이다. 그는 당신을 그러한 감정으로 묶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고정시키고 마비시켜서 당신의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살며 일하도록 만든다.


  2)낮은 자존감은 당신의 꿈(이상)들을 파괴시킨다.

  우리를 후퇴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가? 비판을 받는 것이 두려운가? 모험을 하는 것이 두려운가? 혹은 전통적인 것 때문에 두려워하는가? 아니면 사람들을 두려워하는가? 우리의 낮은 자존감 때문에 우리는 우리 믿은 사람들 전체에게 향한 하나님의 이상을 파괴시키고 있다. 우리 각 사람은 그의 몸의 지체이기 때문에 내가 잘못되었을 때 그것은 전체에게 영향을 미친다.


  3)낮은 자존감은 당신의 대인관계를 해친다.

  사단은 당신이 계속 열등감을 갖고, 부족하게 느끼도록 하며 당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고립되게 만든다. 이렇게 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대개 사람들이 열등감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자신을 스스로 위축시키고 가능한한 사람들과의 접촉을 회피하려 든다. 그리고 이 세상일들이 돌아가는 것을 가끔 바라다만 보고 만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건전한 자화상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적 윤리와 대인 관계에 있어서 기초적인 요소가 된다는 것을 암시한다. 낮은 자존감을 갖고 있는 당신은 필경 자신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자신의 개성미를 가지고 활짝 핀 꽃과 같이 되어 그의 동산에서 화려하고 아름답게 당신의 몫을 담당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4) 당신의 낮은 자존감은 하나님을 위한 당신의 사역에 방해가 된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지어진 우리 각 사람이 지체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가? 우리가 교회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요청했을 때 사람들이 제일 먼저 하는 말이 무엇인가? 하나님께 기회를 드려보지도 않고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잘못이다.

  당신의 낮은 자존감은 사단의 치명적인 심리적 무기이다. 그리고 그것이 당신에게 두려움과 자신의 무가치함을 느끼게 하는 감정의 악순환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할 것이다.


5.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위한 치료(1부)

  당신의 성격 가장 밑바닥 중심에서 당신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서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라는 것이 결정된다.

  우리의 자화상이 형성되는 네 가지 근원 즉 네 가지 요소들이 있다.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 모든 악한 세력을 동반한 사단과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이다. 이 외부 세계는 우리의 자화상이 자라나는 기초 토양의 역할을 한다. 당신의 외부 세계란 당신의 성격 형성에 영향력을 주었던 모든 요인들을 포함한다. 유전적인 것과 출생, 유아기, 유년기, 그리고 사춘기를 말한다.

  

6. 자존감이 낮은 사람을 위한 치료(2부)

  인간의 자아 개념이란 자신에 관해 세워 놓은 스스로의 느낌과 생각의 체계이다. 우리의 자아 개념이 형성되는 네가지 근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우리가 5장에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그 근원이 외부의 세계로부터 온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외부의 세계로부터 받게 되는 것들은 가족들의 거울에 반사된 우리 스스로에 대한 느낌과 영상이다. 우리는 어릴 때 가졌던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어떠한 대우와 사랑과 보호를 받았는가 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또한 우리가 성장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배운 말에 의해서도 결정되는 것이다.

  둘째 근원은 우리의 내부의 세계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육체적, 정서적 그리고 영적인 감각들을 통해서 밖으로 드러낸다. 이것은 우리의 5관과 신경들, 그리고 배우고 기억하고 응답할 수 있는 기능들을 포함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이러한 내적 세계에 결함과 흠과 결점을 가지고 있다.

  셋째 근원은 사단이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우리의 낮은 자존감 형성에 사단이 한 몫을 담당한다. 사단은 그의 무시무시한 무기로서 세 가지 역할을 행사함으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 멸시하게끔 만든다. 사단은 거짓말쟁이요, 참소하는 자요, 또한 우리의 마음을 혼미케 하는 자이다. 이러한 세 가지 여갈 가운데 사단은 열등감과 자신을 부적당하게 여기는 것 그리고 자신을 스스로 축소시키는 것을 사용하여 그리스도인을 패배시킨다. 또한 그 결과 하나님의 친 자녀로서의 온전한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 우리의 자아 개념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이제 낮은 자화상을 소유하게 된 문제의 근원으로부터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화상을 소유하는 능력의 근원으로 옮겨가자.

  하나님과 그의 말씀을 통하여 당신의 잘못된 믿음이 고쳐지도록 하라.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자신을 스스로 격하시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믿음의 기본적 가르침에 역행하는 태도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또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높은 자존감을 소유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말씀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관계를 맺고 있는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에 기초가 된다고 선언했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찌니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엡5:28-29) 바울사도의 말씀이 심리학적으로 정확하게 맞아 들어간다는 것을 우리의 경험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기 때문에 상대방 남편이나 아내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어 결혼생활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결혼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것이다. 당신이 훌륭한 남편이 되기 원한다면 스스로를 키워주는 태도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이렇게 자신을 귀중하게 여기는 태도는 훌륭한 이웃이 되는 데도 필요하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매우 적절하게 경고했다. 각 사람은 자신을 마땅히 생각해야 할 그 이상으로도 생각하지 말고 믿음의 분수에 맞게 건전한 생각을 하여라(롬12:5) 건전한 생각이란 과대 평가도 아니고 과소 평가도 아니다. 이러한 균형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사단이 우리를 혼동케 하고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사단은 “네가 지금 교만해 졌으니 조심하라”고 고소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과 반대의 현상도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다. 낮은 자존감을 소유한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이 인정을 받으려고 애쓴다. 그러한 사람은 어떤 경우에서든지 자기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는 항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데만 열중해 있다. 그가 항상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의식한다는 의미에서 자아 중심적이란 말이다.


  당신 자신의 가치와 귀중함에 대한 인식을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공급받도록 하고 당신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거짓된 영상에 의존하지 말라. 당신이 소유한 낮은 자존감의 치료는 당신이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달려있다. 자신을 깍아 내리는 방법 중 가장 나쁜 것은 그것을 영적으로 미화시키는 일이다.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누가 당신에게 말하기를 “오늘 당신이 노래하는 것을 들었는데 노래를 잘 불러 주셔서 즐겁게 들었습니다.”라고 하면 당신은 아주 신령하게 대답한다. “아, 그리요, 그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하신 것이었지요.” 물론 당신이 주님께 의존하면서 했기 때문에 주님이 하셨다는 것이 잘못된 대답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렇게 말할 필요는 없지 않는가!

  당신은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분 앞에서 당신을 사랑하는 법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 당신이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받아주시고 인정해주시는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것을 아시고 채워주시기를 원하신다. 문제는 여러 가지를 통해서 잘못 형성된 당신의 자화상 때문에 그 사랑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아마 그것이 너무 어렵기 때문에 당신이 있는 그 상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더 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당신이 어렵게 느껴지더라도 고침을 받을 수 있는 과정 가운데로 들어가야 한다고 도전한다. 그리하여 당신은 하나님 자신의 친 아들, 딸로서 머리를 높이 쳐들을 수 있어야만 한다.

7. 완전주의의 증상들

  우울증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고 그 정도의 차이가 크다. 특히 그릇된 영적 자세인 ‘완전주의’가 원인이 되고 있은 우울증에 관해서도 다투어 보고자 한다.

  완전주의는 그리스도인이 와전케 되고, 거룩하게 되며, 성화되거나 혹은 성령 충만의 삶을 사는 것에 대한 모조품이다. 복음적인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괴롭히고 있는 정서적 문제가 완전주의이다.

  완전주의의 증상들은 다음과 같다.

1)꼭 해야 한다는 무서운 압박감.

  이것의 특징은 절대로 무슨 일을 잘 하지 못했다든지 자신이 훌륭하지 못했다고 항상 느끼고 있는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생활의 모든 면에 침투되지만 특히 우리의 영적 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완전주의자들이 좋아하는 세 가지 구절은 “할 수 있었어야,” “꼭 해야 했었어"와 ”그렇게 했었어야“이다.

2)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것.

  완전주의와 낮은 자존감을 소유하는 것이 일맥 상통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자기 자신이나 자기가 한 닐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을 멸시하는 감정에 사로잡히게 된다.

3)근심.

  반드시 해야 한다는 느낌과 자기를 멸시하는 태도는 죄책감과 근심, 그리고 비난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지나치게 예민한 마음을 갖게 한다. 하나님이 당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는 감정이 당신의 영혼을 계속 두드리며 속속들이 스며드는 정죄감이 다시 당신을 찾아온다.

4)율법주의.

  완전주의자들의 과민한 양심과 철저한 죄책감 밑에는 보통 아주 세심한 행동과 율법주의가 깔려 있다. 율법주의란 외적인 것들을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들과 규칙들 그리고 제한된 법칙들을 융통성 없이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역약한 양심과 낮은 자존감을 소유하고 자동적으로 죄책감을 쉽게 느끼는 완전주의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관해 매우 예민하다.

5)분노.

  꼭 해야 하는 것들에 대한 적개심,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대한 적개심, 다른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자기 자신에 대해여 그리고 가장 슬픈 것은 하나님께 대해여 반발하는 적개심을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완전주의자들이 대항하는 것은 결코 만족케 할 수 없는 풍자적인 만화에 나오는 신(神)에게 대한 것이다. 그 신은 그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코 기쁘게 할 수 없으며, 그가 어떤 것을 포기하거나 붙잡아도 만족케 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 무자빟나 신(神)은 항상 조금 더 높이 내기를 걸게 하고, 항상 조금 더 요구하며 말하기를, “미안하게 되었군, 저것 가지고는 부족한데”라고 한다. 이러한 종류의 신(神)에게 대항하는 분노가 완전주의자의 마음 속에 들끊고 있다.

6)부인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분노를 직시하지 않고 부인한다. 화를 내는 것을 무서운 죄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억눌러 버린다. 감정의 변화가 너무 크고 심하기 때문에 이러한 사람은 두 인격을 동시에 소유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이 때 두가지 문제 중 하나가 생기게 된다. 마음이 냉냉해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마음이 와해되는 것이다.

  

  완전주의로부터 궁극적인 치유는 오직 한 가지 뿐이다. 그것은 아주 심오하면서도 단순한 단어인 은혜이다. 은혜란 단어는 헬라어의 “카리스”란 어원에서 온 말로서 “우미, 우아, 친절, 호의”란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 말하는 이 단어의 의미는 특별한 뜻을 지니고 있다. 즉, “꽁짜로 주어진, 과분한, 공 없이 얻은, 일해서 얻을 수 없는, 그리고 갚을 수 없는 호의”란 뜻이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죄 많고 가치 없는 인간들을 향하여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성품 자체이시며 그의 행하시는 행위 자체이시다.

  완전주의를 위한 치료는 매일 매일 믿음으로 사는 가운데 사랑이 많으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 은혜로 맺어진 관계를 깨달음으로 인하여 가능한 것이다. 변화를 경험하려면 시간과, 과정과, 이해와, 치료와, 그리고 무엇보다 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은 생각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8. 완전주의의 치료 과정

  완전주의란 언제든지 자신이 세워놓은 기준에 절대로 도달하지 못하며 자신이나 자신의 행동이 누구를 절대로 만족케 해 주지 못한다는 감정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말한다. 누구를 만족시킨다는 것인가? 모든 사람 즉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그리고 하나님을 포함한다.

  완전주의가 보는 하나님은 자신이 절대로 기쁘시게 할 수 없는 하나님이기에 그에 대한 의심과 반항심과 분노의 감정이 그를 지배한다. 이러한 완전주의를 치료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있다.

  치료는 하나의 과정이다.

첫 단계에서 우리는 빠른 치료에 대한 모든 생각을 버려야 한다. 당신이 완전주의자가 된 것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치유 또한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은혜 안에서 자라가며, 자신의 생각을 재 조정해야 한다. 그리고 생활 전반에 걸쳐서 치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그릇된 개념을 가지고 있는 당신의 생각이 고쳐져야 하며 손상된 정서 생활이 회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자신을 과소 평가하는 그릇된 태도가 고쳐져야 하며, 화합하지 못하는 그릇된 태도가 변하고, 파괴된 대인 관계가 회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은혜라는 단어는 항상 은혜를 주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과 병합되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은혜라는 단어를 마치 하나님께서 나누어 주시는 어떤 상품처럼 취급해서는 안된다. 은혜라는 말은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찾아오신다는 뜻이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 그냥 은혜가 아니라 “내 은혜”였다. (고전16:23, 갈6:18, 빌4:23, 살전5:28, 살후3:18)

  은혜란 어떤 상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 자신을 의미한다. 그가 자신의 은혜로우신 성품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것이다. 사랑이 넘치고 은혜로우신 하나님이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 우리를 받아 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온전한 모습을 갖출 때가 아니라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에게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 주신다.

  정서적인 문제들의 원인들은 대부분 어린 시절에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로부터 온다.

1)만족시킬 수 없는 부모들.

  완전주의와 우울증의 원인은 가정환경의 문제이다. 대부분 부모들이 지니는 공통적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만족할 줄 모르는 부모들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자기들이 정해놓은 어떤 기준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는 조건적인 사랑만을 하게 된다. 만족할 줄 모르는 부모들과 조건적인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목표에 미칠 수 없고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문제로부터 오는 갈등을 경함한다.

2) 예측할 수 없는 가정의 분위기.

  예측할 수 없는 가정 분위기에서 불의를 경험하게 된다. 부모들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 할 수 없는 경우 그 자녀들은 부모들이 자기들에게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절대로 예측하지 못한다. 사람들이 책임감 없이 주고 받는, 이와 같은 말들이 한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손해를 입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어린 마음 속에 심겨진 상처와 수치감과 증오의 씨앗이 시간이 지나면서 곪아 터져서 고름이 나오고 미래에 어른이 된 후의 인격 속에까지 그 균을 전염시키는 것이다.

  치유의 과정에는 화를 노출시킬 수 있는 용기가 꼭 필요하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십자가에서 그것이 용서된다는 사실을 믿고 그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그것을 시인하고, 대면하고, 굳게 결심하기 전 까지는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된다. 마음의 결심이란 상처를 주거나 모욕을 준 사람들을 하나 하나 모두 용서하는 것을 의미하며, 그 사람들에게 대항하여 싸워 이겨야 한다는 모든 욕망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죄의식으로 고민하고 있는 당신의 영혼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깨끗이 씻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마음 속에 원통함을 품게 되는 근본 원인은 불의에 대해 참지 못하는 화(분노) 때문이다. 이렇게 손상된 사람이 치료를 받기 위하여 나아가야 할 곳은 바로 모든 불의의 총 집산지인 십자가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억울하게 받은 고통과 더불어 마땅히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 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우리와 같은 입장을 취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도 십자가에서 일어났던 일보다 더 불의한 것은 없다. 이세상에서 아무도 우리 주님 만큼 배척을 당했던 사람은 없다. 그가 받았던 고소와 시련, 그리고 그의 십자가에 목박힌 사건은 말할 수 없이 불의한 것이었다.

  

9. 초인적 자신(Supre You)과 실제적 자신(Real Ypu)

  완전주의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참된 모습대로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아마도 완벽증의 가장 무서운 결과는 실제적 자기 자신과의 격리 현상일 것이다.

  초인적 자신이란 당신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고 이상적으로 보이려고 만들어낸 거짓된 당신의 이미지이다. 이 왜곡된 생각은 하나님과의 관계에까지 연장된다. 당신은 하나님도 완전한 것을 요구하시는 절대완전주의자로 보게 된다. 그리고 그분에게 오직 당신의 좋은 점만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럴때 당신은 오직 초인적인 당신의 모습만을 하나님께 보이려고 한다. 참된 당신의 모습은 보이기를 싫어한다.

  그다음으로는 뉘우치는 태도로서 실제적인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초인적인 자신의 모습을 추구하려는 방법이다. 자존감이 낮고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이 완전주의자로서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이러한 문제가 생긴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실제 모습을 보시지 않고 그것과는 다른 초인적인 당신의 모습만을 보시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받아 주실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한 자신도 그것을 용납하기 어렵다고 계속 하나님께 말씀드린다.

  완전주의자가 봉착하는 가장 큰 문제는 감정적인 분야인데, 그 이유는 그가 초인적 자아의 이미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절대로 시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감정이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감정이란 단순히 감정에 불과하다. 감정 그 자체는 악하지 않다. 그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따라 당신이 의롭게 될 수도 있고 악하게 될 수도 있다. 감정 자체는 하나님이 부여하신 우리의 인격 형성에 가장 중요한 일부분이 된다.

  당신의 초인적 자아는 분(노여움)을 나쁜 감정으로 간주한다. 많은 경우에 완전한 사랑과 분은 서로 같은 역할을 하며, 완전한 사랑의 결과로서 분이 나타나게 된다. 중요한 것은 당신이 분을 어떻게 표현하며, 분이 났을 때 그것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이다. 분을 나타내며 해소하는 적절한 방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우리는 마음속에 원통함과 비통함을 품게 될 것이다. 많은 결혼 생활들이 파탄 가운데 빠지는 이유는 남편과 아내가 그들의 분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들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을 내라 그러나 조심하라. 분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면 원통함과 비통함이 생기게 된다. 바로 이러한 감정들이 완전주의자가 자신의 분을 겉으로 나타내지 않을 때 생기는 것들이다.

  당신의 실제 감정들을 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 안에서 실제의 당신의 모습을 지닌 사람이 되어라. 실제적 당신 자신의 모습만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또한 보신다. 초인적 자신의 모습은 당신의 상상력에서 나온 환상이며, 거짓된 이미지이고 우상이다. 하나님은 당신을 고치시고 변화시키시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당신이 실제적 자신의 모습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대로 한 인격체로 성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10. 우울증에 관한 오류와 진실

  우울증이란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경험하는 증세이다.(시42:5,6, 시43:5, 왕상19:4, 욘4:3, 마26:38) 우울증의 또 다른 공통적인 증상은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시42:3)라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우울증은 종종 식욕 감퇴 현상을 초래한다.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다. 음식을 먹을 수 없기 때문에 음식 대신 눈물을 먹고 산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도 매우 우울한 가운데 빠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이 그것을 치료하기에 앞서 그는 먼저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우울증을 부인함으로 말미암아 더욱 문제를 악화시킨다. 우울증에 걸린 것이 반드시 영적으로, 잘못된 증거가 될 수 없다. 우울증은 마치 자연이 가져다 주는 감정의 반작용인 것 같이 보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우울증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자기 자신의 성격이 그러한 문제와는 무관하기 때문에 우울증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울증으로 고통을 당하는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해서 당신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영적이라고 가정할 수없는 일이다. C.S. 루이스는 우리가 칭찬받는 절반 가량의 덕(德이) 우리가 영적으로 훌륭해서라기보다는 단순히 기질과 타고난 성품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우울증은 여러 가지 요소들과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의 인격, 구조, 신체적 차이점, 신체의 화학 작용, 홀몬의 분비 작용, 감정적 패턴 그리고 우리가 배워온 느낌을 통한 이해들과 관계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인식하고 용납해야 한다. 우울증에 걸려있는 우리 자신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처리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우울증 증세를 더 확대시키는 근본 원인이 되고 있다.

  우울증은 영적인 근원 이외에 다른 곳으로부터 올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인격 구조 중 어딘가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올 수 있다. 아마 그것이 신체적인 이유가 될 수도 있고 혹은 감정과 인격의 불균형 때문일 수도 있다.

  

  우울증을 극복하며 사는 방법의 첫단계는 당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자신의 기질에 의하여 좌우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구원의 확신을 가진후에 우리는 성령님의 지배를 받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성령님은 당신이 그를 인식하고 그에게 자신을 드릴 때만 우리 안에 충만히 거하시고 우리를 지배하실 수 있다. 당신의 기질이 변화될 수는 없을지라도 당신은 성령님께 자신을 지배하시도록 허용할 수는 있다.


11.우울증의 처리

  당신이 소유한 우울증을 시인하고 검토할 때 당신은 치유를 받기 위한 긍정적인 발걸음을 내 딛는 것이다. 당신은 필경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을 조절하시기 위해 우울증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삶의 조정기로 사용하시고 계시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조정 장치를 통해 계속 비현실적인 삶을 추구하려는 당신을 제재 하시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나타내는 세가지 기본적인 반응들이 우울증을 유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1)결단력의 결핍(우유 부단한 마음)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에 당신은 그것을 계속 되루 미루어 버리는 습관이 없는가? 우울증에 걸려 있는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무력함이다. 당신의 에너지를 건설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사용하는 것이 우울증에 걸리지 않게 되는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

2)분노

“우울증은 응고된 분노이다.” 만약 당신이 지속적으로 심각한 우울증 증세를 보인다면 필경 당신은 생활하는 가운데 해결되지 않은 어떤 면이 있으리라 본다. 낮이 지나면 밤이 꼭 찾아오는 것과 같이 우울증은 마음에 확정함이 없는 사람, 분을 참는 사람, 혹은 분을 함부로 쏟아놓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찾아들기 마련이다.

3)부당하다는 생각

  완전주의자들은 공평과 불공평에 대해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부정당한 가운데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깊은 분노를 마음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용서를 체험하는 길 뿐이다. 이제 당신은 진정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음으로 인하여 그 문제들을 해결할 때가 왔다는 것을 믿으라. 당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와, 불법과, 불공평에 대해 지나치게 예민한 마음을 하나님께 굴복할 때 당신은 자기 비애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우울증의 문제도 곧 해결되는 것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마틴 루터가 우울증에 관해 많은 글을 썼는데 아울러 나누어 보자

1)홀로 있지 말라.

  다른 사람들을 피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격리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한 우울증이 있을 때 경험하는 격리감으로 인해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자신을 강제로 채찍질 하라.

2)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라.

  당신에게 기쁨을 가져다 주는 환경과 친구들을 찾으라. 이 점에서도 당신은 스스로 선택해야 할 절대적인 책임을 가지고 있다.

3) 노래하라! 음악을 즐기라.

  사울왕이 우울증에 빠졌을 때 이 방법으로만 고침을 얻었다. 다윗이 연주했던 음악의 하모니와 아름다움이 우울증으로 억눌렸던 사울왕의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삼상16:14-23)

4)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라

  수세기에 걸쳐 많은 성도들이 이점에 동의 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말한 것도 모두 “모든 일에 실제로 감사하라”(살전5:18)였다.

5)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 깊이 의존하라.

  수세기를 걸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시편 말씀이 가장 유익하게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이유는 시편 기자야말로 우울증으로부터 오는 감정의 하나 하나 모두를 잘 알고 이해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6)성령님의 임재하심 가운데서 확신있는 태로로 휴식을 취하라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계속 임재해 주실 것이란 약속은 그가 즐겨 사용하신 ‘보혜사(Paraclete)란 말 가운데 나타나 있다. 이 단어는 “우리 옆에 와 계셔 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이 예수님의 약속이 당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지도록 하라. 그래서 가장 깊은 우울증 가운데 빠지게 될 때에도 당신이 느끼는 감정과 상관없이 그가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확인하라


12. 치유를 경험한 상담자들

  ‘파라클레이트’의 가장 위대한 사역들은 위로하는 것과 상담을 해 주시는 일이다. 그는 우리 맞은 편에서서 손상되어 연약해진 우리를 항상 붙들어 주실 준비가 되어 있는 분이시다.

상한심령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복음의 기쁜 소식이 있다.

-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우리가 잘났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잘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신다.

-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연약함을 지셨는데 그것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하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우리가 선하게 되기 위해서는 그의 사랑과 그의 용납하심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 성령께서는 그의 끊임없는 임재하심과 능력을 통해서 우리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게 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선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선을 이루기 위해서 그분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이는 참으로 기쁜 소식이다.

  치유란 하나님께서 ‘재생시키는 은혜’(Recycling grace)를 사용하시어 우리를 고치시는 기적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취하셔서 모든 것을 유익하게 만드신다. 그는 실제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우리를 재생시켜 온전하고 유용한 사람들로 변화시키신다. 만일 당신이 깊은 기도와 내적 치유의 과정에 있어서 성령님과 협력만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재생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데 사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재생시키실 것이다. 그렇게 되면 당신은 그것을 바라보고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야만 사역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오직 두 가지 사실 때문에만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고 선언했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갈6:14) 아마도 그 십자가는 모든 인류 역사상 가장 연약함이 크게 나타났던 장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불의가 모두 집합된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온세상을 위한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던 것이다.

둘째로,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연약함 혹은 약함 이라고 했다.(고후12:9-10)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치유를 경험한 상담자들로 부르심을 받을 때 우리가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약함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이다.


출처 : 자료바구니(기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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