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식/중국

중국 운남성 여행 안내

홀기 2007. 8. 29. 21:16

운남성이라고 하면 호도협 트렉킹이 중요한 관광요소이기도 하지만 한국인이 운남성에 가면 좀 더 다른 시각을 갖고 여행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운남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나시족들은 마루래도 먼옛날 고구려시대 때 갈라져 나간 우리 민족으로 후예가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나시족들의 풍습에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만 있는 풍습들이 많이 남아 있어서 그렇답니다. 아래는 그런 시각으로 운남성을 여행하셨던 분이 인터넷에 기고한 글 내용입니다. 기왕 운남성에 가신다니 참고로 한번 보시는게 좋을 것 같아서 퍼다 올립니다.

 

운남(雲南)성은 중국의 남쪽에 있는 지역으로 미얀마·라오스와 맞닿아 있다. 운남성은 해발 2,000m가 넘는 고산지대인데도 아주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다.

이 지역에서 쏟아져 나오는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의 유물은 운남 지방에서 찬란한 고대문화가 꽃폈다는 증거다. 약1,200여 년 전 중국 당(唐)나라 시절 운남성에는 남소(南紹)왕국이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남소왕국은 궁벽한 곳에 있었으면서도 당나라와 비견되는 높은 문화와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고구려가 망하면서 산남(지금의 사천성)·농우(청해·섬서·신장위그르)·강회남(안휘성) 등지로 끌려간 20여 만명의 고구려 포로 중 일부가 중국인들의 학대에 못 이겨 계속 남하해 운남성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바로 이들 고구려 유민이 이 지방에 살던 원주민들과 힘을 합해 고구려에서 가져온 높은 문화를 정착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를 항상 두려워한 당 황실은 부강해지는 고구려 유민들에 대한 견제에 나섰다. 현종이 6만명의 군사를 보내 토벌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당군은 운남성 대리(大理)에 있는 서이하 강변에서 패퇴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당군의 대장 이밀도 전군이 몰살당하는 것을 보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고 하니 이 전쟁이 얼마나 참혹했는지 알 수 있다. 1,200년이 지난 서이하 강 일대를 파면 지금도 당시의 유골이 나온다고 한다.

운남성 탐험의 출발지는 티베트 남쪽, 운남성 서북쪽 끝자락에 있는 호도협(虎跳峽)이다. 문명의 발상지는 항상 강변에 있다는 확신 때문이다. 그런데 운이 따랐는지 호도협에서 나뭇짐을 지게에 지고 내려오는 나시(納西)족 처녀들을 만났다.

지게에는 분명히 짐을 올려 놓을 수 있는 가지가 달려 있었다. 우리의 지게와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지게의 발목이 우리 것보다 짧다는 것.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도 산간 지방에서 사용하는 지게는 비탈길을 오르내릴 때 불편을 덜기 위해 발목이 짧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나라보다 더 가파른 산 속에 사는 운남성 소수민족의 지게 발목이 짧은 것은 문제 될 것이 없다. 백제의 후예이며 옛날부터 인종과 문화 교류가 있었던 일본인들의 지게 또한 발목이 짧다.

지게는 옛날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 문화유산 중 하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평원왕의 딸 평강공주가 온달이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지고 오는 것을 보았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이유로 운남성 탐사를 계획하면서 지게만큼은 꼭 찾아 보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탐험에 나서자마자 소원을 이룬 셈이었다. 지게에 대한 취재를 마친 후 옥룡설산(玉龍雪山)으로 향했다. 해발 2,700m 부근에서 뜻밖에 두어 채의 귀틀집을 발견했다.

귀틀집은 산에서 베어온 통나무를 정방형으로 짜 맞추어 벽을 만들고 나무 껍질이나 풀로 지붕을 덮은 집이다. 우리나라에는 지리산·태백산맥·개마고원·낭림산맥·울릉도 등지의 산간지방에 남아 있던 가옥 형태다.

1,700년 전 기록된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의 변진(弁辰)을 보면 ‘그 나라(우리나라)는 집을 짓는데 나무를 얽어매 마치 감옥과 같이 만든다’는 기록이 있다.

농악놀이 비슷한 나시족의 춤사위

 
해발 1,900m 고지에 위치한 운남성 중서부 도시 大理 시는 서늘한 기후와 아름다운 주변 환경을 갖춰 동양의 스위스로 불린다. 남문에서 내려다본 大理 고성. (위) 大理의 소수민족인 백족 아가씨들.
설산을 떠나 여강(麗江)에 들어선 후 나시족 마을을 찾았다. 마침 무슨 축제가 벌어졌는지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남자들은 저고리에 X자형의 띠를 두르고 여자들은 손잡이가 달린 소북을 치면서 팔과 어깨를 들썩거린다.

우리나라 농악놀이와 어찌 저리도 비슷할까. 나시족은 여러 가지로 우리와 닮은 점이 많다. 그들은 ‘나’를 ‘냐’라고 부르고 ‘너’를 우리와 똑같이 ‘너’라고 부른다.

나시족 마을의 시장에서 나는 정겨운 우리의 문화 몇 가지를 발견하고 기뻐 목이 메었다. 짚방석과 합죽선 그리고 대소쿠리였다. 대소쿠리는 엄지손가락 굵기의 나뭇가지를 휘어 심으로 삼고 여기에 대나무를 엮어 만든다.

대소쿠리를 보고 기뻤던 이유는 대나무 석작이나 반짇고리 같은 공예품은 동남아에서 흔하게 볼 수 있지만 오직 소쿠리만은 여강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운남성 서부의 중심지 대리로 향했다. 대리는 고산준봉과 호수 사이에 자리잡은 그림같이 아름다운 도시다. 대리박물관에 걸려 있는 한 장의 그림에서 다시 우리 민족과 유사성을 찾았다. 이 그림에는 9명의 사람이 앉아 있다.

이들은 모두 도포를 입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의 왕이나 귀족들이 입고 있는 도포와 모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머리 모양도 예사롭지 않다. 모두 상투를 틀고 있다. 머리에 상투를 튼 것은 우리 조상들의 독특한 풍속이었다.

중국 한(漢)나라의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 조선전(朝鮮傳)을 보면 ‘만(滿)은 도망쳐 무리 1,000여 명을 모아 복상투를 하고 오랑캐의 옷을 입은 채 동쪽으로 달아나…’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만’은 고조선을 멸하고 ‘위만조선’을 세운 위만을 뜻한다.

‘사기’의 내용을 풀이하면 위만이 연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도망해 올 때 우리나라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하고 우리 옷을 입었다는 것인데, 사실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 아니고 연나라에 가 있던 우리나라 사람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대리박물관 진열실 안에는 우리나라의 것과 모양이 유사한 석기·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이 많다. 세문동경·쌍어문동경·봉황장식·청동숟가락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인 비파형동검과 비슷한 쌍배형동검과 반달형돌칼이 인상적이다.

반달형돌칼은 세계에서도 우리나라와 중국 동부 및 서북부 일부 지역, 일본 등 아주 제한된 지역에서만 출토된다. 청동기시대의 독특한 유물이다. 인도 북부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구멍이 뚫려 있는 돌칼이 출토되지만 반달형이 아니고 장방형의 것이어서 모양새가 조금 다르다.

특히 반달형돌칼은 우리나라 고인돌에서 많이 출토되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유물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이 반달형돌칼이 우리나라에서 1만 리나 떨어져 있는 멀고 먼 운남성의 산 속에서 출토되었을까.

이 의문은 학자들에게 맡기고 나는 대리에서 400km 거리인 곤명(昆明)으로 향했다. 그리고 곤명에서 천금의 값어치가 있는 우리 민족문화 한 가지를 찾아냈다는 기쁨을 맛보았다.

도로변의 논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이 ‘ㄱ’자 낫으로 벼를 베고 있었던 것이다. 아시아에서 우리나라 것과 모양이 비슷하게 생긴 낫은 오직 일본·운남성·인도네시아의 발리와 수마트라 섬에서만 찾을 수 있다. 낫은 우리 민족이 사용한 역사가 오래 된 농기구다. 고려시대 가요 ‘사모곡’에도 낫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낫은 있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것과 모양이 유사한 낫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서양의 낫은 날이 아주 크고 반달처럼 휜 갈고리 모양을 하고 있다.

중국의 낫은 날이 넓고 자루가 짧으며 동북지방의 낫은 날이 직선이며 자루를 날 끝에 끼우도록 되어 있다. 베트남의 낫은 반대쪽에 조그만 가지가 달려 있어 그쪽으로 벼나 풀을 벤다.

태국과 동남아의 낫은 가늘고 위로 휘었으며 날에는 톱니가 달렸다. 그러나 운남성의 오지 초웅(楚雄)에서 만난 이족 사람들의 행색은 낫보다 더욱 충격적이었다. 그들은 고구려 고분 속 무사처럼 모두 앞머리에 새의 깃을 길게 꽂고 있었다.

고구려가 망한 지 1,300년이 지났는데…. 나는 그 오랜 세월이 바로 엊그제였던 것 같은 감회에 사로잡혔다. 세계에는 새의 깃털을 머리에 꽂는 풍속을 지닌 민족이 고구려 사람들 말고도 많이 있다.

아메리카의 인디언, 중국의 일부 소수 민족, 또 아프리카의 토인들이 그런 풍속을 지녔다. 그렇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들은 짧은 새의 깃털을 머리 뒤에 꽂거나 깃털모자를 만들어 썼다. 긴 새의 깃을 앞머리에 꽂았던 사람들은 고구려 사람들뿐이었다.

잃어버린 우리의 민족사를 보완하기 위해 중국 운남성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의 문화에 대한 학계의 전문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시간이 더 흘러 그들이 현대화되어 버리기 전에 그들에게 화석화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 보완하는 것이 절실하다.